한인의 연해주 진출은 19C 중반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일 강제합병 이후에는 소위 노령지역으로 불리며 항일운동의 또 다른 구심점이 되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 지역의 한인을 중앙아시아지역으로 강제 이주당한 뒤 연해주 지역에서는 점차 한인의 색이 옅어졌다.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를 당했음에도 소련 해체 이후 원래의 터를 찾아 돌아온 고려인들이 있었고,
이로 인해 연해주 지역 한인의 흔적이 다시 발굴, 유지될 수 있었다.
최근,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한 한인들의 흔적을 찾아 기억하려는 시도가 활발하다.
많은 한국인들이 우수리스크를 찾는 목적은 바로 이 흔적을 돌아보는 일일 터.
주로 고려인 문화센터, 4월참변 추모비, 이상설 유허비, 최재형 선생 고택을 많이 다녀가는 것 같다.
문제는 내가 우수리스크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비가 주구장창 내렸다는 것.
그래서 쉬는 셈 하루 제끼기로 하고, 그 다음날 하바롭스크로 가기 전에 날씨가 갠 덕에 다 둘러볼 수 있었다.
내부 사진은 별도로 찍지 않았지만, 고려인문화센터에서는 한인 이주사 및 강제이주 후 고려인의 발자취를 볼 수 있다.
우리는 고려인이라고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이들을 까레이스끼(Корейский)라 부른다고 알고 있다.
전혀 아니다. 까레이스끼는 까레야(Корея)의 형용사형으로, '한국의'라는 뜻이고,
고려인은 까료-사람(Корё-сарам)이라 칭한다. 말 그대로 한국-사람이라는 뜻. 'сарам'은 한국어의 '사람'을 음만 따온 것.
우수리스크에 도착한 그 다음날, 비가 엄청나게 내렸음에도 4월 참변 추모비는 따로 다녀오기로 했다.
(다음날 찾아갈 라즈돌노예 역의 기차시간 때문에 여기는 뺄 수가 없었다.)
4월 참변은 1920년 4월, 일제에 의해 벌어진 한인 학살 사건으로, 그 원인은 다음과 같다.
1920년 3월, 니콜라스크 지역(現 우수리스크)에서 적군에 의해 시베리아 내 일본인 거류민에 대한 학살이 벌어졌다.
그런데 일본군은 보복의 화살을 한인들에게 돌렸고, 1920년 4월 ~ 5월 사이 한인 100여 명을 살해 및 체포했다.
이 시기 최재형 선생 등의 한인 지도자는 상당수 피살되었다.
역사의 현장에 장대비까지 내리니, 그 날의 분위기가 어떠했을까 짐작되는 것은 기분 탓인가 싶었다.
보통 4월 참변 추모비가 비교적 교외에 있어 대개 택시로 방문하는데,
4월 참변 추모비까지 우수리스크 역에서 버스로 바로 갈 수 있다.
우수리스크 역 앞 광장의 버스정류장에서 2번 버스를 타면 되며, "Ленинградская(레닌그라드스까야, шикола No.24)"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우수리스크 역에서 정확히 11정거장 이동하면 된다.
최재형 고택, 이상설 유허비 이야기는 다음 페이지에서.
2019. 8. 20
Written by Konhistory
'나라밖 유람기 > 러시아, 스페인, 포르투갈('19. 8. 2 ~ '20.1.28)'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 우수리스크 (3) - 연해주에 깃든 한인의 흔적 ③ (0) | 2019.08.25 |
---|---|
#10. 우수리스크(2) - 연해주에 깃든 한인의 흔적 ② (0) | 2019.08.25 |
#8. 1번째 이동 - 블라디보스토크 → 우수리스크 : 엘렉뜨리찌까(электричка) 탑승 (0) | 2019.08.19 |
#7. 블라디보스토크(6) - 독수리 전망대(사진 위주) (0) | 2019.08.19 |
#6. 블라디보스토크(5) - 한인의 흔적 : 신한촌(新韓村) 기념비 (0) | 2019.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