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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밖 유람기/러시아, 스페인, 포르투갈('19. 8. 2 ~ '20.1.28)

#82. 바르셀로나(1) - 스페인인가, 카탈루냐인가 / 가우디의 요람

앞으로 스페인, 포르투갈 유람기는 간단하게 쓸 생각이다.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 관련 정보는 인터넷에 생각보다 많이 있어 특별한 정보가 아니면 또 쓰진 않을 듯.

 

앞 글에도 썼다시피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의 중심지다.

카탈루냐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자주 보여온 터라 툭하면 뉴스에 등장하는, 그런 지역이다.

카탈루냐가 처음부터 스페인 왕국에 속한 것은 아니었다.

스페인 왕국에 편입된 것은 18C 초, 바르셀로나 공방전에서 패배한 뒤의 일이다.

그 후 스페인 제2공화국 수립과 함께 자치권을 부여받으며 카탈루냐 자치주로 남아온 것.

그러나 프랑시스코 프랑코의 집권기에 제2공화국 시기 부여받은 자치권을 몰수당하고

카탈루냐어 등의 지역 문화도 탄압받았다. 빼앗긴 자치권을 다시 찾은 것은 프랑코 사후의 일.

스페인의 일원이지만 복잡미묘한 관계를 지닌 곳이 바로 카탈루냐 지역이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 중에는 10월 말에 바르셀로나를 찾았더니 시위 때문에 밖에 나가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어쩌랴. 여행도 중요하다만 목숨 지키는 것이 먼저지.

다행히 내가 바르셀로나를 다녀간 11월 초에는 별 일 없이 여행을 잘 다닐 수 있었다.

날씨까지 좋았으니 다행. 아쉬웠던 점이라면 주변의 피게레스나 세치스 등의 근교를 다녀오지 못한 것.

 

바르셀로나의 11월. 우리나라로 따지면 9월의 날씨 쯤 되겠다.
격렬한 시위는 없었지만 시위가 남기고 간 생채기는 뚜렷하게 남았다.
바르셀로나 골목에는 카탈루냐 독립파를 상징하는 '에스텔라다(Estelada)'기가 심심찮게 걸려있다.

시위 이야기는 이 쯤 하고, 최근 바르셀로나의 인기가 높아져 한국인이 많이 보인다.

애초에 바르셀로나의 인기가 높아진 것도 이유가 있을 터, '가우디'라는 한 단어로 어느 정도 요약된다.

가우디는 카탈루냐 출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카탈루냐의 유지인 구엘 가문의 전속 건축가로 활동했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가우디의 유산이 바르셀로나, 아니 스페인을 먹여 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우디의 건축물인 까사 밀라, 까사 바트요, 까사 비센스 모두 바르셀로나 시내에 있고 들어가볼 수 있다만,

역시나 입장료가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 밖에서 보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시내 한복판의 까사 밀라. 고급 아파트로 쓰이던 건물로 곡선을 이용한 층 구성이 돋보인다.
까사 밀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까사 바트요. 푸른 색 계열의 타일이 돋보인다.
가우디의 처녀작, 까사 비센스. 여기에 이미 타일을 차용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 곳들 말고도 가우디가 설계한 구엘 공원 역시 돌아보기 좋은 곳.

다만 너무 넓으니 시간 넉넉히 잡고 가는 것을 추천한다. 티켓에 표시된 시간에 반드시 맞춰 가야 한다.

티켓을 구매하면 바르셀로나 지하철 4호선 Alfons X 역에서 구엘 공원 간 셔틀버스를 탈 수 있으니,

구엘 공원에서 나오더라도 티켓을 버리지 말자. 셔틀버스는 티켓 지참 시 왕복 무료다.

나는 인터넷에서 신용카드 결제가 안 되어 구엘 공원 매표소에서 직접 예매했다. 입장권 가격은 10유로.

 

구엘 공원에서 가장 넓은 공간. 여기 들어가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으니 티켓의 시간을 잘 확인할 것!
구엘 공원의 타일 장식. 여러 타일 조각을 하나로 붙여 모자이크 형식으로 만들었다.
가우디가 선보인 알록달록한 타일 장식은 가우디의 건축물이 갖는 하나의 상징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가우디가 활동하던 시기, 타일은 건축에 쓰기 매우 아깝게 여겨지던 고급재료였다.

그런데 가우디가 설계한 건축물을 보면(위의 까사 시리즈 뿐만 아니라 구엘 공원에도)

타일을 아낌없이 썼음을 알 수 있다. 가우디가 타일을 마음 놓고 쓴 이유는 구엘 가문의 지원 덕이었다.

구엘 가문 전속 건축가였던 가우디는 그 지원 덕택에 자신이 원하는 만큼 타일을 쓸 수 있었다.

 

용 모양 타일 모자이크. 구엘 공원에서 가장 유명한 모자이크 장식이 아닐까. 용인지는 모르겠다.

바르셀로나 시내 뿐만 아니라 카탈루냐 지역(나중에는 레온 지역에도 있었지만)에는

가우디의 손길이 뻗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카탈루냐는 가우디에게는 자신의 세계였다.

그 많은 건축 중 역작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 아니겠는가.

가우디 생전에 건설을 시작해 아직도 건설 중인, 생전에는 자신의 입으로 200년 걸린다고 말했던 그 성당.

바르셀로나에서는 가우디 사망 100주기인 2026년에 건설을 마무리하겠다고 하던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사진 뒤를 수놓은 타워크레인들이 "나 일하는 중이오!"하는 모습이다. 사진 아래의 수많은 사람은 덤.

아니나 다를까,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은 그 유명세만큼이나 사람이 많았다.

어떻게 봐도 예약하지 않고 오면 기다릴 것이 뻔했다. 입장료도 그만큼 비쌌다.

2019년 기준 탑 입장료까지 포함해 30유로. (나중에 환불해주긴 했지만) 탑 입장료는 7유로였다.

들어갈 때도 짐 검사를 다 하는데, 러시아의 그것을 떠올릴 정도였다.

그래도 들어가서 돌아보다 보면 입장의 귀찮음은 금세 사라질 정도다.

그야말로 곡선의 미학을 얼마나, 어떻게 표현할 지에 대한 극치라 할 수 있겠다.

 

마치 나무 기둥처럼 수많은 대리석 기둥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다.
중앙의 못 박힌 십자가상과 오르간. 주변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돋보인다.
가우디는 곡선을 누구보다 잘 활용한 건축가였다. 가우디는 가우디 그 자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뒤로 나오면 볼 수 있는 가우디 두상 조각. 후세에 복원하면서 추가되었다.

가우디 사후 건설 과정에서 가우디 얼굴을 본딴 조각이 성당에 추가되었다고 하는데,

가우디가 이걸 보고 좋아할 지는 모르겠다. 가우디 자신은 그리스도에게 속죄하는 의미에서 이 성당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가짐으로 건축을 시작했는데, 자신을 그리스도 바로 밑에 둔 이 모습을 보면

되려 기가 차다며 헛웃음을 칠 것이 뻔하지 않은가.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공사 현장 바로 옆의 학교. 지금은 전시관으로 쓰인다.

가우디의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 대공사였던 만큼, 근로자들도 많이 투입되었을 터,

그 근로자들의 자녀들을 맡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가우디는 공사장 옆에 학교를 두었다.

19C라는 시대를 감안한다면 이러한 시설은 근로자에 대한 파격적인 배려였다.

 

여담으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은 완공되지 않았음에도 교황의 축성을 받았다.

카톨릭의 대성전은 오로지 4곳이며,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은 준대성전(Minor Basilica)에 속한다.

그만큼 교계에서도 쏟는 관심이 각별함을 보여주는 사건.

 

바르셀로나에 조금 더 길게 머물렀다면 주변 도시도 다녀왔겠지만,

입국일 빼고 닷새의 시간만 주어졌기에 바르셀로나 시내를 돌아보는 데 주력했다.

그럼에도 돌아볼 곳이 많았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만약 2026년에 예정대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 완공되면 꼭 다시 오리라.

 

2019. 12. 25

Written by Kon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