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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밖 유람기/러시아, 스페인, 포르투갈('19. 8. 2 ~ '20.1.28)

#62. 모스크바(9) - 비 오는 아르바트 거리, 그리고 빅토르 쪼이

러시아 도시를 돌다 보니 도시마다 '아르바트'라는 이름을 가진 거리가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도 모스크바의 거리에 비해 규모가 작긴 하나 아르바트 거리가 있다.

물론 원조는 여기, 모스크바의 아르바트일...까?

하필 또 아르바트 거리를 가려 마음을 먹은 날 비가 왔다. 무기 박물관에 가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아르바트 거리에

다녀오려 했던 건데, 이 무슨... 아무리 가을장마라지만 이 쯤 되면 내가 비를 몰고 다니나?

 

아르바트 거리로 가려면 모스크바 지하철 1, 3, 4, 9호선을 이용하면 된다. 각 호선마다 역명이 다르니 주의!

1호선은 비블리오테카 이메니 레니나(Библиотека имени Ленина, 레닌 도서관) 역,

3호선은 아르바츠카야(Арба́тская) 역, 4호선은 알렉산드롭스키 사드(Метро Александровский сад) 역,

9호선은 보로비쯔카야(Боровицкая) 역이다. 각 호선마다 역명이 다르니 찾아갈 때 유의!

  * 단, 4호선 이용 시 4호선의 아르바츠카야 역으로 가면 제일 빠르다.

 

아르바트 거리 초입. 아직까지는 괜찮다. 아직까지는...

사실 여기를 찾은 이유는 단 하나. 빅토르 쪼이의 추모벽을 찾기 위해서였다.

고려인 이주사(史)는 구한말인 19세기 말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진다.

고려인 이주 초기에는 연해주에서 삶의 터전을 꾸리고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라는 시련을 겪는다. 그럼에도 고려인은 이주한 지역에서 정착하거나 러시아 각지에서 두각을

보이며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그 중 대중음악에서 유명한 인물(한국에도 잘 알려진)이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쪼이(Виктор Робертович Цой)일 게다.

그는 록밴드 '키노(Кино)'에서 활동하며 러시아의 인기 스타로 부상했으나, 1990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사고의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고, 빅토르 쪼이가 사고로 사망하자 빅토르 쪼이를 따라 죽은 사람들도 있다고 할 정도로 그의 인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의 묘소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으며, 이 곳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에는

그를 추모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아래 링크는 그가 몸담았던 그룹인 '키노(Кино)'의 대표곡, '혈액형(Группа крови, 그루빠 그로비)'이다.

당시 소련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중이었고, 전쟁이라는 분위기와 빅토르 쪼이의 중저음, 가사가 어우러져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가사를 보면,

Группа крови - на рукаве, Мой порядковый номер - на рукаве(소매에 적힌 내 혈액형, 소매에 적힌 내 군번아)

Пожелай мне удачи в бою(싸움에서 나의 승리를 빌어다오)

라던가,

И есть чем платить, но я не хочу(대가를 치러야 이길 수 있지만)

Победы любой ценой(그런 승리를 원치 않는다)

라던가. 이 음악을 들어보면 키노의 음악이 어떤지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다.

Группа крови 외에도 Электричка, Лето 등의 좋은 음악이 있으니, 한 번 들어볼 것을 권한다.

 

키노의 8번째 앨범, 'Группа Крови(1988)'의 타이틀 곡, 'Группа Крови'. 당시 공식 발매사가 없었다.

빅토르 쪼이를 추모하는 벽. 그래피티와 낙서 일색이다.
빅토르 쪼이를 상징하는 한 마디, "Цой жив!" (쪼이는 살아있다!)
아침 인사(Доброе утро!)와 함께, 그를 영웅으로 칭송하는 흔적.
기타와 함께, 여전히 쪼이는 러시아인의 가슴 속에 살아있다.

소련이라 하면 대중문화가 극심하게 통제되었을 것 같지만, 체제를 대놓고 건드리지 않는 선이라면 표현의 자유가

어느 정도는 보장되었다. 심지어 소련 말엽인 1986년 5월에는 콤소몰 위원회가 개최한 'Панорама 86(록 파노라마 86')' 이라는 행사도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칼럼을 읽어보면 도움이 될 듯. (http://www.weiv.co.kr/archives/13244)

 

물론 레닌그라드 록 클럽이라는 공식 무대가 아니면 록 뮤지션이 양지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유리 안드로포프 집권기까지 공산당의 통제는 여전했다. 그러나 소련 대중은 통제를 피해 사미즈다트(самиздат)라는

해적 음반을 제작, 공유하며 이들의 음악을 암암리에 접했다. 사미즈다트는 지하 출판물을 뜻하는 러시아어로,

서적, 음반을 모두 이른다.

유리 안드로포프 사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를 등에 업고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며 기존의 음성적 대중문화가 양성화되었고 불법이라 낙인찍혔던 음반들이 허가를 받아 등장한다.

 

빅토르 쪼이는 시대의 격랑에서 소련의 대중음악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남았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자신의 눈에 보인 현실을 노래했기에 수많은 소련인들이 그에 공감할 수 있었고, 불의의 사고로 요절했기에 지금도 그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년이면 벌써 빅토르 쪼이 사망 30주기가 된다.

 

Цой жив!

 

다시 아르바트 거리로 나오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2019. 10. 30

Written by Kon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