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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밖 유람기/러시아, 스페인, 포르투갈('19. 8. 2 ~ '20.1.28)

#42. 카잔(1) - 살다살다 경찰 조서를 다 쓰네 / 카잔 크례믈

카잔에 도착해 숙소 체크인을 하고 긴장이 풀리기도 해 방에 외투를 걸어두고 낮잠을 2시간 잤다.

그런데 저녁을 먹으러 나가며 지갑을 보니 18,000루블이 없어졌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인출한 5,000루블 지폐들이 하나도 없고 1,000루블 지폐도 가져갔다.

잠시 긴장을 푼 사이에 대놓고 지갑에서 현금만 빼갔다. 소매치기는 없었는데 도둑이 있을 줄이야... 등잔 밑이 어둡다.

카드와 여권은 쓸모가 없다 생각했는지 멀쩡히 남아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카드와 여권마저 없어졌으면 여행이고 뭐고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부터 하고 모스크바로 당장 가야 했다.

(카잔에서 제일 가까운 해외공관이 주 러시아연방 대한민국 대사관이다.)

대담한 자식 같으니. 잠깐 잠든 사이에 그걸 훔쳐갈 줄은 상상도 안 했다.

 

여담으로, 러시아에는 총 4개의 재외공관이 있다.

주 러시아연방 대한민국 대사관, 주 상트페테르부르크 총영사관, 주 이르쿠츠크 총영사관, 주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

물론 난 외교부의 작태를 보면 가끔 연락해도 도와주려나 싶은 의심이 생길 때도 있지만,

실제로 내 친구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입국카드를 잃어버렸을 때 주 상트페테르부르크 총영사관에 연락,

현지 경찰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고, 무사히 핀란드로 출국할 수 있었다.

모든 해외공관이 직무태만에 빠진 것은 아니니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기면 일단 연락해보자.

 

각설하고, 상상 그 이상의 일을 마주할 것이라고 이야기했건만 그런 일을 이렇게 맞이할 줄은 몰랐다.

숙소 복도쪽이나 방쪽에는 CCTV가 없었고, 나도 잠을 자고 일어난 터라 누가 훔쳐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내가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는 걸 몸소 깨달은 순간.

(이 이후로 현금 인출을 최소화하고 대중교통 및 200루블 미만의 소액 결제가 아닌 이상 신용카드로 일원화했다.)

 

숙소 쪽에서도 당혹스러웠던지 경찰을 부르고, 지문 채취까지 해갔다.

조서를 쓰긴 했지만 그런다고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물증도 없거니와 그 시간대에 같은 방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른다고 하니, 내가 경찰이어도 잡을 수 없겠지 싶었다. 그냥 내가 조심하는 수밖에.

 

이렇게 당했다고 해서 여행을 끝낼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시내도 돌아다녀보고 여러 군데 찾아보기로 했다.

그렇지만 맥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부주의로 여러 사람에게 민폐를 끼친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카잔은 타타르스탄 공화국의 수도로,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 시내에 모스크가 있을 정도다.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된 카잔 끄례믈 안에도 쿨 샤리프 모스크가 있다.

우선 카잔의 랜드마크인 카잔 끄례믈부터 가보기로 했다.

카잔 크례믈은 카잔 지하철을 타면 쉽게 갈 수 있는데, 'Kremlyovskaya' 역에서 내리면 바로 앞에 끄례믈이 있다.

지하철을 타면 영어로 안내방송도 해주니 길 잃을 염려는 없다. (어째 서쪽으로 갈수록 영어 안내가 더 잘 들린다?)

크례믈 안을 둘러보는 데 입장료는 없으며, 내부의 박물관에 들어가려면 입장료가 필요하다.

 

통상 크렘린이라고 많이 부르는데, 실제 러시아어 발음을 들어보면 '끄례믈'에 가깝다.

그래서 제목과 이 글에서는 크렘린 대신 끄례믈이라고 쓰려 한다.

 

지하철역에서 나오면 보이는 끄례믈 성벽과 쿨 샤리프 모스크. 날씨가 더 좋았으면 했던 아쉬움도.
스파스카야 탑. 저 위의 시계는 시간에 맞게 돌아가고 있다. 탑 밑으로 들어가면 된다.
쿨 샤리프 모스크. 안에서 이슬람 예배도 진행되고 있었다. 

마침 모스크 안에 들어가볼 수 있어 들어가봤다. 모스크답게 내부는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가득.

이슬람 특성상 우상 숭배를 극도로 꺼리는지라 사소한 것조차도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며 상징물을 만들지 않았다.

카톨릭, 러시아 정교에서 쓰는 십자가와 같은 것도 이슬람에서는 우상숭배라며 일절 쓰지 않는다.

그로 인해 등장한 것이 바로 아라베스크 무늬고, 아라베스크는 도형 문양, 문자, 식물 덩굴 문양 등을 형상화한 것이다. 심지어 똑같은 것이 없을 만큼 그 형태는 무궁무진하다.

 

쿨 샤리프 모스크 천정의 아라베스크 문양. 둘레는 아랍 문자를, 지붕은 덩굴무늬를 차용한 모습이다.
이전 사진의 윗부분에 있는 아라베스크 문양. 이 문양이 문자를 이용한 아라베스크 문양.
숨바이크 탑. 워낙 높이 솟아있어 볼가 강 건너편에서도 보일 것 같다.
카잔 크례믈에서 바라본 농부의 궁전. 실제로 농림부 건물로 쓰고 있다나?
카잔 크례믈에서 바라본 볼가 강. 말 그대로 타타르스탄의 젖줄이라고 할 만하다.

그렇게 카잔 크례믈을 다 둘러보고 나오는데 뭔가 한국에서 많이 본 버스가 한 대 있었다.

그런데 한국 번호판을 달고 있는 것이 신기해 한 장 담았다.

 

부대에서나 많이 봤던 대우 버스를 이역만리 러시아 땅에서 보게 될 줄이야.

마침 운전자께서 차량에서 내리시길래 어떤 분이신가 여쭈었더니, 아들 두 명과 함께 시베리아 횡단 중이라고 하신다.

차는 동해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환적해서 오셨고, 카잔 이후에는 바로 모스크바로 가신다고 하셨다.

마침 차량에 유튜브 아이콘이 있길래 잠시 뒤에 보니 아들들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나오던 것도 기억난다.

이렇게 여행하는 분들을 보면 대단하고 부럽다는 생각과 함께, 나도 저렇게 여행할 수 있을까 싶다.

모쪼록 무사히 모스크바와 유럽을 누비시길 기원하면서 크례믈을 떠났다.

 

러시아를 다니는 내내 신기했던 점 하나. 해당 지역 민족어를 간판에 병기하는 것.

우리나라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일지도 모르지만, 러시아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풍경이다.

러시아는 '연방 국가'다. 즉, 러시아는 여러 연방관구와 주, 공화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공화국의 경우 각 공화국을 구성하는 민족에 대한 존중이 이뤄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위처럼 관공서의 간판에는 러시아어와 해당 공화국의 언어가 병기된다.

단일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나라와는 매우 다른 풍경이다.

 

2019. 9. 29

Written by Kon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