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타(Чита)라는 도시에서 무얼 할 것인가 생각을 해봤는데, 뭔가 할 것이 많은 도시는 아니다.
애초에 광산 도시로 개발되었고 데카브리스트의 난 당시 유배에 처해진 장교들이 일부 왔다는 점,
소련 치하 살아남았던 2곳의 티베트 불교 사원 중 하나인 아긴스코예 사원을 제하면 특색 있는 도시는 아니다.
(심지어 아긴스코예 사원은 치타에서 좀 떨어져 있다. 물론, 러시아 기준으로.)
그러므로, 여기는 쉬어가는 동네!
치타 역은 규모가 상당하다. 일부 열차는 이 역을 기종점으로 삼는다.
특정 요일에는 중국 만저우리 혹은 베이징까지 가는 열차도 출발한다. 나름 철도의 비중이 큰 도시.
그래서인지 중국인들도 왕왕 보인다.
이르쿠츠크에도 데카브리스트의 난과 관련된 박물관이 있다.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시베리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1825년 12월, 제정 러시아의 일부 청년 장교들이 서유럽으로부터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아 일으킨 정치 개혁 운동이다. 러시아어로 12월이 'дека́брь(데카브리)'임을 안다면 이 사건이 12월에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청년 장교들은 나폴레옹 전쟁 시기 나폴레옹을 쫓아 유럽을 원정하며 서유럽으로부터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청년 장교 세력은 해방동맹이라는 모임을 조직해 활동했으나, 이 모임은 의견의 차이 때문에
북부 결사, 남부 결사, 통일 슬라브 결사 등으로 나뉘었다. 이 조직들은 공화정, 입헌군주제, 연방제를 두고 시각의 차이가 있었다. 헌데, 1825년 12월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한 뒤 동생인 니콜라이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이를 틈타 청년 장교 세력은 니콜라이 1세의 형인 콘스탄틴을 왕위에 옹립한다는 명분으로 니콜라이가 즉위하는 날
반란을 일으켰지만 제압되었다.
이 때 체포된 청년 장교는 사살되거나 시베리아로 유배되어 더 이상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 청년 장교들이 유배를 당한 곳 중 일부가 바로 이르쿠츠크와 치타였다.
박물관에는 데카브리스트의 난 당시 인물들과 관련된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물론, 러시아어를 잘 알 경우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입장료는 200루블, 사진 촬영을 할 경우 50루블 추가.
(굳이 50루블을 더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함.)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을 나와 저녁을 먹고, 식당 바로 옆이 레닌 광장이라 한 번 돌아보기로 했다.
광장이 시끌벅쩍하길래 와 봤더니, 마침 광장에서 춤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다.
광장이 넓어서 이런 축제 열기에는 정말 좋을 것 같더라.
(소련 시절에는 이런 축제보다도 퍼레이드가 주구장창 열렸겠지... 아마...?)
확실히 치타에서는 계속 쉬기만 했던 것 같다. 열차에서 보낸 37시간의 후유증이 적지 않았거니와
여행을 시작한 지 2주 지나면서 잠시 재충전 및 사진 정리를 할 시간도 필요했다.
정리를 하지 않으니 계속 쌓여만 가는 사진에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리기 직전까지 왔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되는데, 실수를 계속 한다. 사람은 역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니까...
2019. 8. 31
Written by Kon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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