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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밖 유람기/러시아, 스페인, 포르투갈('19. 8. 2 ~ '20.1.28)

#95. 무르시아(3) - 엘체(Elx) 야자수림 : 주(酒)님 뵙다 주(主)님 뵐 뻔

토레비에하에서 다녀온 날, 숙소에서 술을 좀 마셨다. 숙소 자체도 꽤 노는 분위기였고.

그런데 맥주, 와인으로 모자라 같은 방에 있던 프랑스 게스트가 준 꼬냑을 마시고 골로 갈 뻔했다.

술은 절대 섞어 마시는 게 아니랬건만 분위기에 취하고, 종류 상관 없이 술을 마셨더니 속까지 뒤집어졌다.

그럼에도 무슨 배짱인지 엘체(Elx)에 다녀오겠다는 고집을 부렸다.

(진짜 쉬었어야 했다. 이게 화근이 되었는지 마드리드에서 한 방 당했다.)

대신, 천천히 다니되 몸이 더 안 좋아진다 싶으면 바로 무르시아로 돌아오기로 했다.

다행히(?) 엘체를 오가는 버스는 토레비에하보다 많았다. 게다가 1시간 안팎이면 도착하니,

하루 잡고 왕복하기에도 무리는 아니다.

 

엘체 버스터미널. 무르시아와 상당히 가깝다.

엘체 야자수림은 터미널에서 걸어서 300m 남짓 가면 펼쳐지지만,

이 날은 300m도 멀게 느껴질 만큼 몸 상태가 말도 아니었다. 그래도 어쩌랴, 왔으니 가보는 것은 당연했다.

무식해서 용감하다지만, 나중에 있었던 일을 돌아보면 이건 그냥 무식한 짓이었다.

 

날씨가 좋으면 뭐하나... 몸이 고장났는데...

각설하고, 엘체의 야자수림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의외라면 의외의 장소다.

왜 별 것 아니어뵈는 야자수림이 세계문화유산에 오를 정도로 중요한가 싶어 알아봤더니,

북아프리카 지역의 아랍인들이 자신들의 식생을 이베리아 반도에 이식한 게 지금까지 이어져온 것.

즉, 엘체의 야자수림은 스페인의 식생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17C 초, 모리스코(무슬림에서 카톨릭으로 개종한 사람들)이 엘체에서 추방되었고,

이 숲을 관리할 사람들이 없어지자 야자수림은 금세 황폐해졌다.

더욱이 기존의 야자수림 지역에 마을이 생기면서 야자수림의 면적은 더욱 감소했으며,

산업화, 철도의 부설에 밀리며 야자수림의 소멸을 걱정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비로소 20세기에 이르러, 이전의 야자수림에 비하면 줄어들긴 했으나 야자수림 보존을 시작해

1986년에는 야자수림 보존 관련 법률이 통과되기에 이르렀다.

지금은 엘체의 야자수림에 여러 사람들이 산책하러 많이 온다.

 

야자수림 내부의 정원. 주위의 야자수가 울창하다못해 하늘로 뻗어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야자수들이 전후좌우에 그득하다.
야자수림을 유지하기 위한 물을 끌어오던 시설도 있다.
야자수림의 또 다른 모습. 물을 끌어와 정원처럼 만든 곳도 있다.
야자수림에서 많이 보이는 대추야자. 여기서 수확되는 대추야자 열매는 지금도 식용으로 쓰인다.

신기한 점이라면, 근 천 년 가까이 된 관개시설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어 야자수림 유지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옛날 사람들의 머리가 더 좋았던 것은 아닐까 싶다.

아픈 것도 잊고, 정신 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 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저녁은 무르시아에서 먹기로 하고, 다시 엘체 터미널에 버스를 타러.

 

돌아갈 때도 역시 ALSA!

2019. 1. 27

Written by Konhistory